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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감상] 제주, 역사적 관점에서 다시 보는 "폭싹 속았수다"

by 보부상C 2025. 4. 2.

제주, 역사적 관점에서 다시 보는 "폭싹 속았수다" 관련 사진

 

tvN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사랑 이야기라는 외피 속에 제주도라는 공간이 가진 역사와 정서를 깊이 있게 담아낸 작품이다. 특히 1950년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제주 사람들의 삶을 통해, 이 드라마는 단지 개인의 인생사가 아닌 한 지역이 겪은 집단적 고통과 기억, 회복의 여정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폭싹 속았수다〉를 단순한 멜로드라마로 보지 않고, 제주 4·3 사건과 그 이후의 사회적 상처를 중심으로 재해석해본다.

 

1. '폭싹 속았수다' 줄거리 (스포없음)

1950년대 제주도. 거센 바람이 부는 섬마을에서 태어난 소녀 애순과 소년 관식은 서로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유난히 말이 없고 조용한 소년, 그리고 생기 넘치고 마음만은 누구보다 깊은 소녀. 어릴 적부터 가까이 자라온 두 사람은 늘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쉽게 말하지 못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어린 시절, 그들은 ‘그냥 늘 곁에 있는 사람’으로 서로를 받아들인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하며, 두 사람의 삶에도 크고 작은 굴곡이 찾아온다. 제주는 육지와 단절된 섬이었고, 삶은 언제나 거칠고 고단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애순과 관식은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삶을 살아간다. 어떤 날은 서로를 바라보다 스쳐 지나가고, 어떤 날은 오해 속에 등을 돌리기도 하며, 또 어떤 날은 아무 말 없이 눈빛만으로 모든 마음을 전하기도 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을 평생에 걸쳐 이해하려는 과정,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가슴에 담고 지내는 시간, 그리고 결국 그 마음이 시간의 강을 건너 도달하는 이야기이다. 제주의 자연은 늘 그들 곁에 있다. 바닷바람, 돌담길, 해녀, 방언, 그리고 제주의 느린 시간들. 이 모든 것들이 애순과 관식의 삶을 감싸고, 그들의 감정을 더욱 짙게 만든다.

 

<폭싹 속았수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누군가의 마음에 머물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마음이 세월을 통해 어떻게 무르익고 깊어지는지를 보여준다.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이야기,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랑이지만, 아주 특별하게 기억되는 인연에 대한 드라마.

기억보다 오래 남는 감정, 그리고 마음속 깊이 내려앉는 사람.

 

<폭싹 속았수다>
우리 모두가 지나온 첫사랑, 혹은 놓쳐버린 인연의 기억을 되살리는 이야기이다.

2. '폭싹 속았수다' – 언어에 담긴 제주인의 삶과 정서

제목인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 방언으로 ‘완전히 속았어요’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단순한 감탄이나 놀라움을 넘어서 제주도 사람들의 삶의 태도, 고통을 대하는 방식, 체념 속의 유머를 상징한다. ‘폭싹’은 철저히 무너졌다는 의미, ‘속았수다’는 고통을 농담으로 바꾸는 제주인의 해학을 보여준다.

 

제주도는 오랜 시간 중앙 정부와의 거리, 문화적 단절로 인해 육지와는 다른 독자적 정서를 발전시켜 왔다. 고립된 섬에서의 삶은 스스로 견디는 힘, 감정을 삼키는 언어,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의지를 키워냈다.

드라마 속 애순과 관식이 자주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말보다 행동으로 관계를 이어가는 모습은 제주도 특유의 생존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들의 침묵, 참음, 조용한 헌신은 섬사람의 사랑 방식이자, 전쟁과 억압을 견뎌온 민중의 모습이다.

3. 제주 4·3 사건 – 드라마 이면에 흐르는 금기의 역사

〈폭싹 속았수다〉는 직접적으로 ‘제주 4·3 사건’을 다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드라마의 시작이 1950년대 초라는 시점은, 이 사건의 여파가 여전히 제주 전역에 영향을 미치던 시기다. 그렇기에 드라마의 배경 자체가 4·3 사건 이후의 제주 사회, 즉 침묵과 두려움, 상처와 외면이 일상화된 공간이다.

1) 제주 4·3 사건이란?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을 기점으로 발생한 무력 충돌 및 진압 작전이다.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미군정과 좌우 갈등, 단독정부 수립 반대 운동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가운데, 제주에서 남로당 세력과 일부 무장대가 무장 봉기를 일으켰고, 이에 대해 정부는 군·경을 동원한 강경 진압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이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희생되었으며, 마을 단위의 소각, 학살, 고문, 납치가 벌어졌다. 사망자는 공식적으로 약 3만 명(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 비공식적으론 그 이상이라는 추정도 있다.

2) 사건의 원인

  • 미군정 하의 정치적 억압: 해방 이후 미군정은 치안 유지와 반공 정책에 집중하며 좌익계열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 좌우 이념 갈등: 친일 경찰과 행정 관료 복귀 → 주민의 반감 심화
  • 1948년 단독 정부 수립 반대 운동: 남한만의 총선거에 대한 저항이 제주에서 강하게 나타남
  • 정부의 무차별 진압 정책: 무장대가 아닌 일반 민간인까지 ‘통비분자’로 몰아 학살

3) 결과와 제주 사회의 변화

  • 집단 트라우마: 말도 못 꺼내는 금기, 가족 단위의 침묵 문화 형성
  • 정부에 대한 불신과 회피
  • 육지에 대한 거리감: 중앙과 단절, ‘외지 사람’에 대한 경계심 강화
  • 정서적 냉소와 자기 억제의 정체성 강화

이러한 정서들은 드라마 속 제주 사람들의 태도 속에 녹아 있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을 품고 견디며 살아가는 방식은 4·3 이후 제주 사회가 체득한 생존술이다.

4. 애순과 관식의 관계 – 섬사람의 사랑, 오해와 인내

드라마의 핵심 축은 애순과 관식, 두 인물의 수십 년에 걸친 사랑과 엇갈림이다. 하지만 그들의 감정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다. 이 드라마의 사랑은 시간을 기다리고, 침묵을 견디며, 공동체와 가족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흘러가는 감정선이다.

애순은 늘 강하고 활달한 듯 보이지만, 타인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절제된 인물이다. 관식은 말이 없고 느리지만, 오래 참으며 마음을 놓지 않는 사람이다. 이러한 캐릭터성은 모두 섬이라는 폐쇄적 공간, 가부장 중심의 가족 구조, 그리고 역사적 상처에서 비롯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많은 것을 감내하지만, 말을 아끼고 표현을 미루며 오해를 만든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제주도의 ‘사랑 방식’이다. 사랑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눈빛과 손끝으로 전달되는 감정이다.

5. 〈폭싹 속았수다〉 속 사랑과 이 시대의 사랑, 그 사이에서 생각해볼 것들

  • 말하지 못하는 사랑 vs 말로 쉽게 주고받는 사랑
    드라마 속 애순과 관식은 말 대신 침묵과 행동으로 마음을 표현합니다. 사랑을 고백하는 데 수년이 걸리기도 하고, 오해를 풀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기도 합니다. 반면 현대 사회는 감정 표현의 속도가 빠르며, 좋아함과 사랑의 경계도 비교적 쉽게 넘나듭니다. 우리는 지금, 말이 많아진 대신 사랑의 무게는 가벼워진 건 아닐까요?
  • 기다리는 사랑 vs 즉각적인 관계 중심의 사랑
    〈폭싹 속았수다〉에서는 한 사람을 수십 년 동안 마음에 담고 살아갑니다. 기다림은 사랑의 일부이며, 시간은 관계를 깊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연애는 '기다림'보다 '타이밍'이 중시되고, 관계의 유효기간이 짧아졌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오래, 한 사람을 기다릴 수 있을까요?
  • 책임과 인내의 사랑 vs 감정 중심의 사랑
    드라마 속 사랑은 단순한 감정보다 ‘책임’과 ‘인내’가 중심입니다. 표현은 서툴러도 마음은 단단합니다. 반면 오늘날 사랑은 ‘내가 느끼는 감정’에 충실한 경우가 많고, 조금만 맞지 않아도 관계를 쉽게 정리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감정보다 오래 지속되는 ‘관계의 약속’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 환경이 사랑을 결정하던 시대 vs 선택의 시대
    애순과 관식은 섬이라는 한정된 환경 속에서, 시대의 굴레 안에서, 때로는 사랑조차 선택하지 못합니다. 현대는 훨씬 더 많은 선택이 가능해졌지만, 그만큼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는 어려워졌습니다. 자유로워진 지금, 오히려 우리는 더 쉽게 사랑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요?
  • 기억 속에 남는 사랑 vs 지금 눈앞의 사랑
    드라마는 ‘기억’에 남는 사랑을 다룹니다.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감정,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 반면 우리는 현재에 집중하는 사랑을 더 선호하며, 지나간 사랑은 정리해야 할 감정으로 여기곤 합니다. 정말 사랑은 기억 속에서 사라져야만 끝나는 걸까요?

〈폭싹 속았수다〉는 이런 질문들을 우리에게 조용히 던집니다.
속도와 표현이 앞서는 시대, 말 없는 사랑이 주는 울림은 어쩌면 더 깊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사랑을 하고 있으며, 어떤 사랑을 바라고 있는지 되돌아볼 시간입니다.

6. 드라마의 미학 – 공간이 곧 서사인 제주

〈폭싹 속았수다〉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바로 ‘제주도’다. 카메라에 담긴 제주의 풍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시간과 기억이 머무는 장소, 즉 서사의 일부이자 인물의 감정선과 직접 연결된 장치다.

자연은 아름답지만 거칠고, 바다는 푸르지만 쉽게 떠날 수 없는 장벽이며, 집과 마을은 아늑하지만 바깥세상과 단절된 감옥이기도 하다. 이러한 공간 속에서 인물들은 시간과 싸우며, 기억을 품고, 사랑을 견디며 살아간다.

제주의 바람, 돌담, 해녀, 사투리, 그리고 조용한 술자리까지 모든 것이 한 민족의 삶의 흔적이자 감정의 언어다. 이러한 구성은 단지 지역색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섬사람의 인생이 곧 서사’임을 보여주는 깊은 연출력이다.

우리가 잊고 있던 땅, 제주

〈폭싹 속았수다〉는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과 역사, 그리고 감정의 복원 작업이다.

제주는 오랫동안 말하지 못한 땅이었다. 4·3이라는 비극을 겪고, 침묵을 강요당했으며, 자신의 슬픔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섬이었다.

 

이 드라마는 그 잊힌 땅의 사람들을 복원하고, 그들이 품었던 침묵과 사랑을 다시 꺼내 보이게 한다.

결국 〈폭싹 속았수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기억’을 말하고, ‘제주’라는 공간을 통해, ‘역사’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보며, 단지 애순과 관식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이 겪은 고통과 그 속에서 피어난 사람들의 연대기를 함께 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