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줄거리 요약 – 다시 태어난 자아, 그리고 무너지는 정체성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은 과거 할리우드에서 이름을 날렸던 전설적인 스타였지만, 현재는 50세의 나이로 TV 운동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한물간’ 방송인에 불과하다. 생일날, 방송국으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은 그녀는 실의에 빠지고, 그때 미스터리한 시술 기관으로부터 “서브스턴스(The Substance)”라는 신약을 제안받는다. 이 약물은 신체를 복제해 젊고 완벽한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주는 실험적 기술이며, 단 하나의 규칙은 ‘두 존재가 7일씩 번갈아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시술을 받으며, 복제된 젊고 아름다운 자아 ‘수’(마거릿 퀄리)가 탄생한다. 수는 젊고 매혹적인 외모를 갖추었고, 곧바로 할리우드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급부상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후에 시작된다. 수는 점점 엘리자베스를 밀어내기 시작하고, ‘원본’의 존재가 무시되면서 위기가 발생한다. 약의 규칙을 깨고 수가 더 많은 시간을 차지하자, 엘리자베스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붕괴에 시달리게 되고, 두 자아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면서 끔찍한 육체 파열과 신체 붕괴가 발생한다. 영화는 이 과정을 통해 젊음을 둘러싼 욕망, 자아 정체성의 파괴, 존재의 의미를 심도 있게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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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화제작 <서브스턴스(The Substance)>는 단순한 장르 영화 이상의 충격과 사유를 던지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자기혐오’, ‘여성성의 해체’, 그리고 ‘바디호러’를 중심으로 현대 사회가 몸과 존재를 어떻게 소비하고, 배제하고, 재창조하는지를 시각적으로 풀어낸다. 전성기를 지나버린 여성 스타가 젊음을 되찾기 위해 위험한 선택을 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영화는 인간 존재의 유효성, 사회적 시선, 신체에 대한 통제 욕구,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근본적인 질문에 도달한다. 이 글에서는 영화 <서브스턴스>가 왜 단순한 공포가 아닌지, 그리고 왜 이토록 불편할 만큼 충격적인지를 자기혐오, 여성성, 바디호러 세 가지 키워드로 해석해본다.
2. 자기혐오 – 나를 지우고 싶은 욕망, 그 끝의 파괴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은 이 영화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한때 전설로 불렸던 스타였지만, 이제는 나이 들었고, 사회적으로도 ‘쓸모없어졌다고 여겨지는’ 존재다. 생일날, 방송국에서 해고 통보를 받는 장면은 단순한 직장 상실이 아닌 ‘사회적 사망’을 상징한다. 더 이상 카메라 앞에 설 자격도, 존재 이유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메시지. 이 순간, 엘리자베스는 좌절이 아닌 혐오에 빠진다. 그것도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
우리는 이 지점에서 현대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하는 “기한이 있는 가치”를 목격한다. 젊고 아름다울 때만 가치 있고, 시간이 지나면 퇴출당하는 현실. 엘리자베스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다시 젊음을 얻을 수 있다’는 제안에 흔들리고, 결국 수락한다. 그녀가 선택한 ‘서브스턴스’는 단지 외모를 되돌리는 시술이 아니다. 그것은 “나보다 나은 나”를 만드는 약물이다. 이 물질은 신체를 복제하여 새로운 자아, 즉 더 젊고 아름다운 자신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결정은 곧 자아의 파괴로 이어진다. 새롭게 태어난 ‘수’는 점점 주도권을 쥐고, 엘리자베스를 배제하며 그녀를 잊히게 만든다. 처음엔 통제할 수 있었던 존재가, 점점 현실에서 자신을 밀어낸다. 자기혐오가 만든 또 다른 자아가, 오히려 자신을 파괴하는 역설적 구조.
<서브스턴스>가 보여주는 자기혐오는 단순한 외모 콤플렉스의 수준을 넘어선다. 그것은 ‘존재의 조건’을 잃어버린 자가 느끼는 무의미함,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에 맞지 않는 몸을 가졌을 때 경험하는 존재 소외다. 우리가 진짜 두려워하는 건 ‘나이’가 아니라, ‘사라지는 감각’이다. 이 영화는 그 감각을 자기혐오라는 키워드로 압축하며, 자아 붕괴의 시작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3. 여성성 – ‘이상적 몸’이 만든 정체성 붕괴
엘리자베스가 진짜 잃어버린 것은 ‘젊음’이 아니라 ‘존재의 자리’다. <서브스턴스>는 이 지점을 여성의 신체와 사회적 위치를 통해 명확히 시각화한다. 영화는 중년 여성의 몸을 결코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는 그녀의 주름, 무너진 근육, 처진 피부를 정직하게 비춘다. 그리고 곧바로 대비되는 수의 모습—젊고 탄력 있고 매혹적인 자아—를 제시한다. 이 강렬한 시각적 대비는 곧 사회가 원하는 이상적 여성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현대 사회는 ‘젊음’을 숭배한다. 여성에게 젊음은 미덕이고, 가치의 척도이며, 상품성을 결정짓는 기준이다. 엘리자베스가 느끼는 위기의 본질은 단지 노화가 아니라, “더 이상 사랑받을 수 없는 몸”이라는 자각이다. 영화 속 수는 바로 이 사랑받는 몸의 이상화된 형상이다. 그녀는 파티에 초대받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카메라 앞에서 환호받는다. 반면 엘리자베스는 혼자 어둠 속에 갇히며 점점 잊혀진다.
<서브스턴스>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영화 후반부에서 두 자아가 하나의 몸을 두고 충돌할 때, 이는 단순한 신체 파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여성이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젊고 아름다운 자아는 살아남고, 나이든 자아는 썩어간다. 이는 단순한 호러 연출이 아니라, 우리가 내면화한 여성성에 대한 폭로다. 사회는 끊임없이 젊고 완벽한 여성을 요구하고, 우리는 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버린다.
엘리자베스는 결국 수를 통해 다시 사랑받고자 했지만, 그 사랑은 진짜 ‘나’가 아닌, ‘사회가 원하는 나’에 향한 것이었다. 이 지점에서 정체성은 완전히 붕괴된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사랑받는 이유는 진짜 나여서인가, 아니면 외적인 조건 때문인가? 이러한 질문을 직면하게 만드는 <서브스턴스>는 단지 여성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특히 여성에게 더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사회가 여성을 향해 더 가혹한 ‘기준’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그런 기준을 시각화하고, 파괴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끝까지 묻는다. “너는 너로 충분한가?”
4. 바디호러 – 피와 살로 드러나는 자아의 파편
<서브스턴스>는 2024년 바디호러 장르 중 가장 충격적인 영화 중 하나로 손꼽힌다. 하지만 이 영화의 공포는 단지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신체 파열은 곧 자아 해체의 물리적 은유다. 수가 약물의 규칙을 무시하고 더 많은 시간을 차지하게 되면서, 엘리자베스의 몸은 점점 썩고 부패해간다. 이 장면은 외면적으로는 고어 호러지만, 내면적으로는 ‘사라지는 자아’에 대한 공포다.
그들은 하나의 육체를 두고 싸운다. 이 싸움은 단지 물리적 공간의 쟁탈전이 아니라, 존재의 인정과 삭제를 두고 벌이는 상징적 전투다. 수가 활동하는 시간 동안 엘리자베스는 검은 액체 속에서 잠들어 있어야 한다. 이 장면은 너무나 명백하게 사회적 은유다. 우리가 젊고 가치 있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동안, 우리는 어딘가에 갇혀 점점 무의미해진다.
이 영화의 바디호러는 자아의 해체를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처음엔 주름과 노화, 그다음엔 통제력 상실, 마지막엔 신체의 완전한 분해. 수는 점점 엘리자베스의 몸과 삶을 차지하고, 엘리자베스는 존재의 끝자락에서 몸조차 빼앗긴다. <서브스턴스>의 진짜 공포는 여기 있다. 타인이 아닌, ‘내 안의 또 다른 나’가 나를 죽이려 한다는 설정. 그리고 우리가 그 자아를 스스로 창조했다는 사실. 바디호러의 진수는 그 고통과 공포가 외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욕망과 자기부정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육체적 파괴를 통해 정신적 자살이라는 개념을 시각화하며, 관객에게 심리적 고통의 극한을 보여준다.
<서브스턴스>는 겉으로는 호러지만, 실제로는 정체성과 존재 가치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는 철학적 작품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관객에게 묻는다. "나는 나로 충분한가?" 엘리자베스는 이 질문에 대해 끝까지 싸운다. 비록 젊고 아름다운 수가 그녀를 밀어내려 하지만, 그녀는 존재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싸움은 승리가 아닌, 생존을 위한 저항에 가깝다.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에서도 엘리자베스가 완전히 회복되었는지 알 수 없다. 오히려 이 영화는 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남긴다. 젊음이 아닌 몸으로,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 삶은 사랑받을 수 있는가?
<서브스턴스>는 여성의 이야기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이상을 좇느라 자아를 해체해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든, 이 영화가 남기는 질문 앞에서 멈춰서게 된다.
우리는 왜 존재를 입증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교체하려 드는가? 존재의 조건은 외모도, 성공도 아닌데, 왜 우리는 그렇게 믿게 되었는가?
이 영화는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서사 속에서, 가장 인간적인 질문을 던진다. 바로, “너는 너로 충분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