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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 쉰들러 리스트 (Schindler's List, 1994)- 인간의 구원과 용기의 무게

by 보부상C 2025. 4. 17.

1. 쉰들러 리스트, 줄거리 요약 (스포일러 포함)

영화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점령 하에 놓인 폴란드 크라쿠프를 배경으로, 독일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리암 니슨 분)의 변화를 따라간다. 전쟁 초반 그는 기회를 포착해 유대인을 값싼 노동력으로 쓰며 공장을 운영하며 막대한 부를 쌓는다. 그러나 유대인 게토의 강제 이주, 학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의 이송 등 전쟁의 비극을 목격하면서 점차 마음이 바뀐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희생하면서까지 유대인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보호하며, 궁극적으로 1,100명 이상의 유대인을 죽음에서 구해낸다.

영화는 쉰들러가 나치 장교 아몬 괴트(랄프 파인즈)라는 악의 화신 같은 인물과 대조되면서, 인간이 어떻게 선과 악 사이에서 움직이는지를 정면으로 묻는다. 마지막에 쉰들러는 자신이 더 많은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후회 속에 오열하며, 이 영화는 잊을 수 없는 메시지를 남기고 끝난다.

2. 쉰들러 리스트의 시대적 배경: 홀로코스트와 쉰들러의 실존 이야기

쉰들러 리스트는 단순한 전쟁 영화가 아니라, 20세기 인류가 겪은 가장 극단적인 비극, 홀로코스트를 정면으로 응시한 작품이다. 영화의 핵심 배경은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이며,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약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조직적으로 살해되었다. 크라쿠프 유대인 게토의 설립과 해체, 플라쇼프 강제 수용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우슈비츠로의 이송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며, 스필버그는 이를 철저한 고증과 절제된 연출로 담아냈다.

쉰들러라는 인물은 실존 인물이다. 실제로 그는 독일 남부 출신의 사업가였으며, 영화처럼 초반에는 전쟁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점차 유대인 노동자들의 처지를 목격하며 내면의 전환을 겪었고, 결국 그들을 구하기 위해 나치 고위 인사에게 뇌물을 주고, 본인의 전 재산을 사용해 ‘쉰들러 리스트’를 만든다. 이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유대인들은 실제로 생존했다. 이 감동적인 실화는 폴란드 유대인 생존자 레온 레이슨의 회고록이나, 유대인 기록 센터(Yad Vashem)에서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쉰들러의 이야기가 특별한 이유는, 그가 영웅이기 이전에 지극히 인간적인 회의와 욕망 속에서 점점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부터 선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준다. 사람은 완벽해서가 아니라, 결국 옳은 선택을 하려 했기에 위대한 것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스필버그는 쉰들러의 변화를 단순한 회개나 각성의 드라마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구원의 길을 택했음에도 끝까지 고통받고 후회하는 모습은, 역사가 개인에게 남기는 상흔이 얼마나 깊은지를 말해준다.

3. 인상 깊은 장면 분석

수많은 명장면이 있지만, 단연 기억에 남는 것은 작은 빨간 코트를 입은 소녀를 쉰들러가 바라보는 장면이다. 영화 전반이 흑백으로 구성된 가운데, 오직 그 소녀만이 ‘빨간색’으로 칠해진다. 이 장면은 쉰들러에게 인간으로서의 죄책감을 각인시키는 결정적 계기이자, 관객에게도 한 아이의 죽음을 통해 ‘숫자’가 아닌 ‘존재’를 느끼게 한다. 그저 익명의 수만 명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고유한 생명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 이 장면을 보고 나면, 더 이상 홀로코스트를 거리 두고 볼 수 없게 된다.

또 하나의 강렬한 장면은 마지막, 쉰들러가 자동차 열쇠와 배지를 보며 오열하는 장면이다. “이걸 팔았으면 두 명은 더 살릴 수 있었는데...” 그의 절규는, 인간이 무언가를 구한 후에조차 느끼는 미완의 죄의식과 무력감을 보여준다. 진정한 구원은 언제나 고통을 동반한다는 걸 이 장면은 잊을 수 없게 만든다.

4. 개인적 감상과 감정의 흐름

이 영화를 보며 나는 단순히 "좋은 영화였다"고 느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감정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처음엔 "쉰들러 같은 인물이 있었기에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지만, 곧바로 그런 생각조차 미안해졌다. 왜냐하면, 쉰들러 한 사람이 수천만의 침묵 속에서 빛났다는 사실은, 동시에 그만큼 침묵한 다수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나치의 잔혹함보다 더 무서웠던 건, 그것을 가능한 현실로 만든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가스실 앞에서 아이를 품에 안고 걸어가는 엄마의 뒷모습, 수용소에서 숫자로 바뀐 인간들, 무기력하게 일상을 받아들이는 유대인들의 눈빛은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았다. 이 영화는 나로 하여금 인간의 잔혹함뿐 아니라, 그 잔혹함 앞에서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것의 위험성을 마주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쉰들러의 오열을 보며 울 수밖에 없었다. 그 눈물은 단지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어쩌면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의 무게를 대신 흘려준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구원자이기 전에, 고통을 끝까지 감당하려 했던 사람이다. 나는 그 모습에서 어떤 신성한 인간다움을 봤다. 그리고 이 영화가 진짜로 위대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끝내 인간의 존엄성을 말한다. 아무리 악이 짓누른다 해도, 누군가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고, 단 한 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모든 걸 걸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라는 것.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말을 잃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에게 질문했다. “나는 그때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5. 생각해볼 질문 혹은 오늘날과의 연결

오늘날 우리는 과거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린다. 스마트폰으로 몇 초 만에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학살, 난민, 억압의 현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장면을 보며, 우리는 정말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 있을까? 쉰들러 리스트는 단지 “그때 이런 비극이 있었지”라고 회상하게 만드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관객의 어깨를 조용히 누르며 묻는다 — “지금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오스카 쉰들러는 완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결함투성이였고, 탐욕스럽고, 오랫동안 침묵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바로 그가 “더는 외면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때, 1,100명 이상의 목숨이 구원받았다. 이 이야기의 감동은 거창한 영웅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 비로소 사람다워지는 순간의 용기’, 거기서 진짜 힘이 나온다.

쉰들러가 가진 자원은 재산과 인맥이었지만, 우리가 가진 건 또 무엇일까? 우리의 목소리, 지식, 연대, 선택들… 그것도 분명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자원일 수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는 삶의 많은 장면들이 새롭게 느껴졌다. SNS에서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농담을 보았을 때, 아파트 경비원이 추운 날 복도에서 식사하던 장면을 목격했을 때, 나는 쉰들러가 코트의 배지를 바라보던 그 눈빛을 떠올리게 된다. “이걸 팔았으면 두 명은 더 살렸을 텐데...”

그것은 단지 후회의 말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마주하고 있다는 자각이기도 하다. 결국 쉰들러 리스트는 우리 모두에게 ‘쉰들러 리스트’ 하나쯤은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건 사람일 수도, 행동일 수도, 단 한 마디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먼 훗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때, 당신 덕분에 내가 살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