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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 애프터썬 (After Sun, 2023) - 친구는 펑펑 울고 나에게는 잔인했던 영화, 사랑의 흔적에 대하여

by 보부상C 2025. 4. 8.

애프터썬 (After Sun, 2023) - 친구는 펑펑 울고 나에게는 잔인했던 영화, 사랑의 흔적에 대하여. 관련 사진

1. 애프터 썬 줄거리 요약 (스포일러 포함)

〈에프터썬〉은 한 소녀가 어른이 된 후,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한 한여름의 휴가를 기억해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영화는 줄거리를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파편적인 장면, 감정의 결, 일상의 순간들이 조용히 이어지며 감정과 기억의 흐름을 따라간다.

 

주인공 소피는 열한 살, 아버지 캘럼은 서른한 살. 이들은 터키의 어느 리조트에서 짧은 휴가를 함께 보내며 시간을 보낸다. 두 사람은 같이 수영을 하고, 게임을 하고, 서로를 찍어주며 다정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 속엔 말로 다 전해지지 않는 슬픔이 숨어 있다.

 

캘럼은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고,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해 보인다. 소피의 생일을 축하하면서도 무언가에 무너져 있는 듯한 그의 모습은 소피에겐 완전히 감지되지 않는다. 그저 "괜찮아"라고 말하며 소파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바다를 보며 조용히 눈을 감는 그의 모습은 관객에게만 슬며시 감정을 드러낸다.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어른이 된 소피가 당시의 기억을 다시 들여다보는 방식을 취한다. 오락실 속 플래시처럼 번쩍이는 기억, 비디오 카메라에 남겨진 잔상, 그리고 카메라 속 아버지와 현재의 소피가 겹쳐지는 마지막 장면은 아버지와의 이별이 어떻게 기억 속에서 뒤섞이고 남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실제도 죽지 않고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객은 영화 내내 조용히 준비되고 있었던 이별을 감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곧 삶 속의 상실과 기억이 우리에게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묻는 열린 결말로 이어진다.

2. 개인적 해석 – ‘기억’이 남긴 온기와 상처 사이

〈에프터썬〉은 부모와 자식 사이의 기억을 다룬 영화이지만, 그 기억이 반드시 따뜻하고 다정하지만은 않다. 이 영화는 ‘있었다’는 것, '함께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복잡한 감정을 남기는지를 보여준다.

 

캘럼은 소피에게 사랑을 주려 애쓴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힘인지, 삶의 마지막 여행인지는 명확히 그려지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는 아이의 기억 속에 좋은 아버지로 남고 싶어했고, 그것이 그를 버티게 한 이유였다는 것.

하지만 문제는, 그 사랑이 잠깐이었다는 데 있다. 소피는 자라서 그 기억을 꺼낸다. 아버지를 향한 애정과 그리움, 그리고 그가 남기고 떠난 공백. 이 영화는 그 간극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추억’은 따뜻함이 아니라 상처가 되기도 한다.

 

기억은 우리를 살게도 하지만, 동시에 붙잡아놓기도 한다. 존재했다는 것이 너무 선명해서 더 아프고, 잠깐의 따뜻함이 그 이후의 삶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기도 한다.

 

〈에프터썬〉은 끝까지 있어주지 못한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잠시라도 함께했던 순간을 미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있었던 일’로 남고, 소피의 삶을 구성하는 조각이 된다. 어쩌면 이 영화는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기억이 너에게 무엇이었느냐"가 아니라, "그 기억을 어떻게 안고 살아갈 거냐고."

3. 개인 감상평 – 슬픔이 길게 번져 남은 자리

〈에프터썬〉을 극장에서 본 날, 함께 있던 친구가 펑펑 울었다. 우울증을 오래 앓았던 친구였고, 그 친구의 아버지도 우울증을 앓았다고 했다. 친구는 아마도, 아버지가 마지막 힘을 짜내어 자신에게 남겨준 어떤 장면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짧은 시간, 작지만 확실했던 애정. 그 찰나의 빛이 너무 소중해서, 다시는 닿을 수 없기에 더욱 슬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장면 앞에서 조금 다른 감정을 느꼈다. 잔인한 감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런 추억이 없었다면, 덜 힘들지 않았을까.’ 함께한 기억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것이 너무도 짧고 아름다웠기에, 소피는 더 오래 슬퍼하게 된 것 아닐까.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지키고, 함께하겠다고 한 사람이 끝까지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면, 그건 과연 ‘있는 힘껏 사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그 짧은 순간만으로도 충분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른이 된 소피는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사진기를 만지작거리며 옛 장면들을 회상하던 그녀의 표정은 공허했고, 그리움은 고요한 폭력처럼 마음속을 흔들고 있었다. 〈에프터썬〉은 내가 한 번도 정확히 말로 꺼내지 못했던 감정을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그리고 그 감정은 어떤 사랑보다도 오래 남아 마음을 두드린다.

 

이 영화는 나를 울게 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오랫동안 멈춰 서 있게 만들었다. 그건 어떤 감정보다 더 오래가는 슬픔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슴에 남아,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의미를 되묻게 되는 그런 감정이었다.

 

그렇기에 〈에프터썬〉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기억의 무게’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 짊어진 채 살아가는 감정의 결이기도 하다.

4. 생각해볼 거리 – 상실 이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에프터썬〉이 보여주는 슬픔은 단순한 부재의 슬픔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있었음’으로 인해 생긴 슬픔이다. 누군가의 흔적이 아주 선명하게 남아있을 때, 그 부재는 더 깊은 그림자를 만든다.

현대 사회에서 우울증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고 다정한 사람이 사실은 마음속에 깊은 어둠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캘럼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소피에게 좋은 아버지로 남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그의 아픔은 소리 없이 새어나온다. 그는 '괜찮아'라고 말하며 소피를 안심시키지만, 정작 본인은 괜찮지 않았던 것이다. 이 모습은 지금 우리 곁의 많은 사람들을 떠오르게 한다.

〈에프터썬〉은 사랑하지만 다가가지 못했던 거리, 함께 있었지만 이해하지 못했던 시간들을 조용히 보여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아이러니.

 

이 영화는 ‘함께 있는 시간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아주 짧은 순간일지라도, 진심이 오간 시간은 평생을 흔들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묻는다. 그 진심이 너무 짧았을 때, 남겨진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기억은 힘이 될 수도 있지만, 상처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 기억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 〈에프터썬〉은 말보다 더 긴 여운을 남기는 침묵으로, 슬픔을 품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렇게 속삭인다. “함께했던 시간은 지나갔지만, 너는 아직 그 시간으로부터 살아가고 있어.” 그리고 우리는 그 시간의 그림자를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아주 조용히, 그러나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감정과 함께.